2010년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이 시작한 ‘기부 서약(Giving Pledge)’이 16년 만에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피터 틸이 12명 이상의 서명자에게 철회를 권유하고, 코인베이스 CEO 브라이언 암스트롱이 서약 서한을 삭제하면서 억만장자 기부 문화의 구조적 한계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사망한 서명자 22명 중 실제 약속을 이행한 사람은 8명에 불과하다.
서약의 시작과 쇠퇴
2010년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이 공동으로 창설한 기부 서약은 억만장자들이 재산의 절반 이상을 자선 목적으로 기부하겠다고 공개 선언하는 이니셔티브다. 출범 초기 5년간 113개 가문이 서명하며 폭발적 성장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후 성장세는 급격히 둔화했다. 6~10년 차에는 72개 가문, 11~15년 차에는 43개 가문으로 줄었고, 2024년에는 단 4개 가문만 신규 서명했다. 2025년 5월 11명이 새로 합류하며 소폭 반등했지만, 초기의 열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 현재 30개국에서 250명 이상이 서명한 상태이며, 미국 억만장자 중 서명자는 110명으로 전체의 12%에 그친다.
| 구분 | 수치 |
|---|---|
| 출범 초기 5년 서명자 | 113개 가문 |
| 6~10년 차 서명자 | 72개 가문 |
| 11~15년 차 서명자 | 43개 가문 |
| 2024년 신규 서명자 | 4개 가문 |
| 현재 총 서명자 | 250명 이상(30개국) |
| 미국 억만장자 서명 비율 | 12%(110명) |
| 사망 서명자 이행률 | 22명 중 8명 |
피터 틸의 반란: “가짜 부머 클럽”
기부 서약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은 실리콘밸리의 보수 자유지상주의 진영에서 나왔다. 피터 틸은 서약 자체에 서명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기존 서명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이탈을 종용하고 있다. 틸은 서약을 “에프스타인 인접 가짜 부머 클럽(Epstein-adjacent, fake Boomer club)”이라 칭하며, 일론 머스크에게는 “서약을 유지하면 당신의 돈이 빌 게이츠가 선택한 좌파 비영리단체에 흘러갈 것”이라고 경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틸은 “내가 대화한 서명자 대부분이 서명한 것을 후회한다고 표현했다”고 밝혔다. 약 12명 이상의 서명자에게 철회를 권유했으며, 이미 흔들리는 이들에게는 공식 이탈을 종용했다.
조용한 이탈: 암스트롱의 서한 삭제
피터 틸의 노골적 캠페인 외에도, 조용히 서약에서 거리를 두는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 코인베이스 CEO 브라이언 암스트롱은 2024년 중반 별다른 공지 없이 기부 서약 웹사이트에서 자신의 서한을 삭제했다. 이에 대한 공식 해명은 없었다. 실리콘밸리의 자유지상주의 진영은 기업을 세우고, 일자리를 창출하고, 혁신을 이끄는 것 자체가 진정한 사회 기여이며, 그 위에 자선을 덧씌우는 것은 사회적 관습이거나 미덕으로 포장된 강탈이라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이러한 시각은 2025~2026년 트럼프 행정부의 정치 지형과도 맞물리며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서약의 민낯: 부는 늘고 기부는 정체
기부 서약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이행률이다. 2010년 최초 서명한 미국 억만장자 32명의 자산은 서약 이후 인플레이션 조정 기준으로 166% 증가했다. 자산은 폭발적으로 불어났지만, 기부 속도는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사망한 서명자 22명 중 실제로 재산의 절반을 기부한 사람은 8명뿐이다. 생존 서명자 중 약속을 완수한 쌍은 로라와 존 아놀드(Laura & John Arnold) 부부가 유일하다. 20억 달러(약 2조 9,000억 원) 이상을 기부한 아놀드 부부는 예외적 사례로 꼽힌다. 더 큰 문제는 기부금의 행방이다. 원래 서명자들이 기부한 약 2,060억 달러(약 298조 7,000억 원)의 80%는 사설 재단으로 흘러갔고, 비영리단체에 직접 전달된 금액은 370억 달러(약 53조 6,500억 원)에 불과하다. 멜린다 프렌치 게이츠도 “충분히 기부했느냐고? 아니다(Have they given enough? No)”라고 인정했다.
기부 문화의 갈림길: 한국에 주는 시사점
글로벌 억만장자 자산은 2020년 이후 81% 증가해 18조 3,000억 달러(약 2경 6,535조 원)에 달한다. 옥스팜(Oxfam)의 2026년 보고서에 따르면, 2025년 억만장자들의 자산 증가분만으로도 전 세계 모든 사람에게 250달러(약 36만 2,500원)를 나눠줄 수 있는 규모다. 한편 전 세계 4명 중 1명은 정기적인 식량 접근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대기업 오너 가문의 사회 환원 논의가 지속되고 있지만, 미국의 기부 서약 사례는 구속력 없는 ‘도덕적 약속’의 한계를 명확히 보여준다. 법적 강제력 없이 개인의 선의에만 의존하는 기부 구조는 부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데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점이 16년간의 실험으로 입증된 셈이다. 매켄지 스콧이 최근 수년간 약 200억 달러(약 29조 원)를 기부하며 예외적 행보를 보이고 있지만, 이는 개인의 의지에 달린 문제로 시스템적 해법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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