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정부가 국가안보투자법(NSI Act)의 AI 분야 의무 심사 범위를 대폭 축소한다. ‘기성품(off-the-shelf)’ AI를 활용하는 기업은 심사 대상에서 제외되며, 고급 AI를 직접 개발·수정하는 기업에만 집중한다. 12주간의 산업계 의견 수렴을 거친 이번 개혁은 영국을 글로벌 AI 투자 거점으로 유지하겠다는 전략의 일환이다.
영국 정부가 3월 12일(현지시간) 국가안보투자법(National Security and Investment Act, 이하 NSI Act)의 의무 신고 규정을 개정하는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대런 존스(Darren Jones) 총리실 수석장관은 “기업이 영국에 투자할 수 있도록 올바른 선택을 하고 있다”며 “기업의 우려에 귀를 기울여 규정을 명확히 하고, 불필요한 규제는 줄이되 핵심 분야의 통제는 강화한다”고 밝혔다. 이번 개혁의 핵심은 AI 분야의 투자 심사 범위를 좁혀 스타트업과 기술 기업의 자금 조달 부담을 줄이는 것이다.
무엇이 바뀌나: AI ‘기성품’ 심사 면제
가장 주목할 변화는 AI 분야의 의무 신고 범위 축소다. 현행 NSI Act는 AI 시스템과 관련된 거래에 대해 광범위한 의무 신고를 요구해 왔다. 그러나 개정안에 따르면, 소비자용 기성품 AI를 내부 업무에 활용할 뿐 해당 기술에 대한 실질적인 연구·개발(R&D)을 수행하지 않는 기업은 신고 대상에서 제외된다. 심사 대상은 AI 시스템을 직접 개발·생산·테스트·평가하면서 “새로운 기능을 수행하거나, 동일한 작업을 더 빠르게 혹은 더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드는” 기업으로 한정된다. 다만 AI 안전성 테스트, 허위정보 탐지, 보건·안보 위험 관련 AI 시스템은 여전히 심사 대상에 포함된다. 영국 정부는 ‘표준 업무용 AI’의 정확한 정의를 아직 확정하지 않아, 전환 기간 동안 일부 기업의 준수 불확실성이 남아 있다는 점도 인정했다.
급증하는 신고 건수가 개혁을 촉발하다
이번 개혁의 배경에는 NSI Act 시행 이후 급증한 신고 건수가 있다. 2024~2025 회계연도 기준 총 신고 건수는 1,143건으로, 전년도 906건 대비 25% 증가했다. 이 중 56건(4.5%)이 정밀 심사(call-in) 대상으로 지정됐고, 전년도 41건에서 크게 늘었다. 최종 조치 명령(final order)은 17건으로 전년도 5건의 3배 이상을 기록했다. 승인 없이 거래를 완료한 위반 사례도 60건이 적발됐다. 주요 인수자 출신국은 영국, 중국, 미국 순이었다.
| 항목 | 2023~2024년 | 2024~2025년 | 변동 |
|---|---|---|---|
| 총 신고 건수 | 906건 | 1,143건 | +25% |
| 정밀 심사(call-in) | 41건 | 56건 | +37% |
| 최종 조치 명령 | 5건 | 17건 | +240% |
| 승인 없는 거래 위반 | – | 60건 | 신규 집계 |
| 의무 신고 대상 분야 | 17개 | 17개 (재편) | 수도 신규 추가 |
신고 건수의 급증은 기업들에게 상당한 행정 부담을 안겼다. 특히 AI 스타트업의 경우 시드 단계나 시리즈A 투자 유치 과정에서도 NSI Act 신고 의무가 발생할 수 있어, 해외 투자자들이 영국 AI 기업에 대한 투자를 꺼리는 원인 중 하나로 지목돼 왔다. 업계는 전체 신고의 95.5%가 별도 조치 없이 통과(no further action)되는 상황에서, 저위험 AI 거래까지 일률적으로 심사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라고 주장해 왔다.
AI 외 분야: 반도체·수도·데이터센터 재편
AI 심사 완화와 동시에, 영국 정부는 다른 핵심 분야의 심사는 오히려 강화·재편한다. 반도체와 핵심 광물은 기존 ‘첨단소재(Advanced Materials)’ 카테고리에서 분리돼 각각 독립 분야로 승격된다. 수도(Water) 분야는 처음으로 의무 신고 대상에 포함돼,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17개 수도 사업자가 적용 대상이 된다. 데이터 인프라 분야도 확대돼 제3자 운영 데이터센터, 클라우드 서비스 제공자(CSP), 관리형 서비스 제공자(MSP)가 새롭게 포함된다. 이로 인해 약 50개 추가 기업이 심사 대상에 편입되고, 연간 약 10건의 추가 신고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 에너지 분야에서는 의무 신고 기준이 기존 1GW에서 500MW로 하향 조정돼 중소 규모 에너지 사업자까지 포괄하게 된다.
글로벌 AI 투자 유치 경쟁 속 영국의 포석
이번 개혁은 영국 정부의 ‘AI 기회 실행 계획(AI Opportunities Action Plan)’과 맥을 같이한다. 영국은 이미 밴티지 데이터센터(Vantage Data Centres), 엔스케일(Nscale), 킨드릴(Kyndryl) 등으로부터 140억 파운드(약 26조 3,200억 원)의 AI 인프라 투자를 확보했고, 국제투자정상회의에서 250억 파운드(약 47조 원)의 추가 투자를 유치한 바 있다. 정부는 자국 AI 연산 역량에 10억 파운드(약 1조 8,800억 원)를 직접 투자해 2030년까지 연구용 컴퓨팅 자원을 20배 이상 확대할 계획이다. 이 같은 공격적 투자 유치 전략과 규제 완화를 동시에 추진함으로써, 영국은 미국·유럽연합(EU)·중국과의 AI 패권 경쟁에서 ‘투자 친화적 규제 환경’이라는 차별점을 내세우려는 것이다.
한국에 주는 시사점: 규제와 투자의 균형
영국의 이번 조치는 AI 규제와 투자 유치 사이의 균형이라는 보편적 과제에 대한 하나의 해법을 제시한다. 한국도 2026년 1월부터 AI 기본법이 시행되며 규제 체계를 정비하고 있지만, 지나친 규제가 AI 스타트업의 자금 조달과 글로벌 경쟁력을 저해할 수 있다는 우려도 존재한다. 영국 사례처럼 ‘저위험 AI 활용 기업’과 ‘고위험 AI 개발 기업’을 구분해 차등 규제를 적용하는 접근법은 한국의 정책 설계에도 참고가 될 수 있다. 2차 입법은 2026년 하반기 의회에 상정될 예정이며, 최종 시행까지는 추가적인 산업계 의견 수렴이 이뤄질 전망이다. AI 투자를 둘러싼 글로벌 규제 경쟁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영국의 실험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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